안녕,
나 양벼락이야.
엄청 더워지는데 잘들 지내고 있니? 난 지난 주말에 군산 선유도에 가서 썬크림도 안 바른 채로 아들이랑 두 시간 넘게 바닷가를 즐기다가 어깨에 화상을 입어버렸지 뭐야. 초등학생 때 이후로 이렇게 즐겁게 논 적이 있나 싶지만 안 그래도 급격히 진행되는 노화를 조금이라도 피하기 위해서 래쉬가드를 열심히 검색하고 있다. (안 놀 생각은 절대 안하지 흐흐)
오늘은 (늘 그랬지만) 사적인 덕업일치 좀 써보려고 해. 2023년부터 누적된 수많은 실패로 인해 나는 내가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는' 연습을 여러 번 하게 되었거든. 아직도 내 가슴 속 깊은 곳의 야망은 다시금 의지를 불태우려고 하지만 외부 환경이 주는 '어쩔 수 없음'에 과도한 노출을 겪은 내 머리는 '응 그렇구나' 정도로만 반응하며 더 많은 생각하기를 중단하는 관성에 들어가 있거든. MBTI 검사하면 나는 N 지수가 좀 높게 나오는 편인데(그래봤자 70퍼센트 대), S 성향이 강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사는 요즘이야.
너무 사적인 글 될 거 같아서 나중에 오글거려서 삭제할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보는 사람도 적은데(=없는데?) 일기처럼 써볼게.
사적인 듯 예술적인, 덕업일치 - Issue No.8
어쩔 수 없음을 받아들임
죽을 고비
나를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알고 있는 스토리인데, 나는 2021년 12월에 임신중독증으로 혈압이 180까지 튀어서 34주만에 응급 제왕을 하고도 두 번에 걸쳐 나를 덮친 산후 출혈로 말 그대로 '죽을 고비'를 넘겼었어. 1월에 태어날 애들을 12월에 태어나게 해서 미안한 마음, 조산하는 바람에 아이 둘 다 2키로도 안 되는 몸무게로 낳아버렸다는 실패감 때문에 내가 죽었다 살아났다는 것에 대해서는 '현대의학 만세, 대한민국 의료인 만세' 정도만 외쳤지 감사하다는 생각은 많이 하지 못했어. 때는 바야흐로 한창 엘디프의 사업이 상승 곡선을 타고 있었던 때인데 이 중요한 시기에 초소형 회사의 한 인력이 애를 낳아버렸으니 그에 대한 송구스러움이 더 컸달까.
부모 되는 것과 사업가로 살아남기를 병행하는 것은, 하나도 제대로 들기 힘든 역기 두 개를 이 팔로 들었다가 저 팔로 들었다가 그마저도 안 되어서 머리에 얹었다가 허리 디스크가 오는 것 같은 일이야. 그 어느 쪽에도 excuse를 만들고 싶지 않은 욕심이 컸기 때문이겠지. 심지어 죽을 고비를 넘긴 것에 대한 감사도 생략할 정도로 내 욕심은 컸나 봐. 사실 극한의 고통이 있거나 혼수상태에 있었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내가 정말 죽을 뻔했나? 싶은 생각이 아직도 들지만 그건 이 우수한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서 살고 있는 한 인간의 지독한 오만함일 거야. 나 같은 보통 중의 보통인 인간이 미래를 꿈꿀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창조주에게 머리를 조아려야 할 판에 그 누구도 나에게 뭐라 하지 않는데 육아도 사업도 제대로 못한다며 내가 나를 괴롭히고 있었으니 말야.
죽을 고비로도 정신을 못 차린 한 인간에게 펼쳐진 건 끝없는 낙담이었어.
현타
대학생 때 부터였을까? '안 되는 것도 되게 하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것 같아. 모든 것은 마음가짐에 달려있다. 된다 된다 하면 된다. 원효대사 해골물 마셔가면서 말이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안 되는 것을 되게 한 적은 없었는데 늘 도전정신에 절어 살았어. 의욕은 큰데 늘 결과가 따라오는 건 아니다보니 뭔가가 잘 되지 않으면 '왜 안 됐을까'를 고민하며 원인을 찾으려 했고, 결과물이 불만족스러울 때는 '나는 왜 이런 것도 못할까' 자책하기도 했어. 가장 최악인 순간은 남들은 다 잘하는 것 같은데 나만 뒤처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였지.
그런데 생각보다 '안 되는 것'들은 많더라. 그런데 그게 왜 안되는 거냐면, 내가 한도 없는 미래를 가지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 나라는 인간은 어떻게 살았으면 좋겠다라는 그 '어떻게'가 너무 터무니 없었던 거지. 터무니 없음을 목표로 삼고 뛰면 현타가 자주 올 수밖에 없겠지. 세상은 이 '현타'를 사용하여 나의 오만함을 제거하기로 전략을 바꾼 것 같아. 내 기준에서 '원래 잘 되던 것들'을 다 안 되게 하면서.
실패가 쌓이고 쌓이다가, 현타가 쌓이고 쌓이면서 내 성격도 많이 바뀌더라고.
받아들임
요즘은 그냥 '안 된 거는 안 된 거다' '못한 거는 못한 거다' '뒤처진 건 뒤처진 거다' 이렇게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 같아. 무기력함이랑은 조금 다른, 그냥 현실에 발 딛고 살게 된 것 같달까. 늘 이상을 바라보며 향상심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벅찬 마음으로 살던 한 인간이 어느 날부터 육아라는 거대한 산을 이고 사업이라는 바늘구멍을 통과하려 하니 구멍 너머로 보이는 희미한 빛만 보고는 도저히 못 살겠더라고. 그래서 그냥 인정했어. 나의 하루의 1/4은 육아에, 1/4은 사업에, 1/4은 일상생활(식사, 멍 때리기, 운동 등)에, 1/4은 잠에 써야 한다는 것을. 사실은 내가 아무리 노력했더라도 그 노력을 하는 것까지만 내 몫이라는 것을. 노력 후에 내가 마주치는 모든 결과와 환경들은 내 의지와 상관 없고 결국 내가 어쩔 수 없는 것임을. 그리고 타인의 도움 없이는 나 스스로의 정체성이 온전히 존재할 수 없음을.
하루하루 내가 해야 할 노력들을 다 하는 것 만으로도 영 기진맥진해서 말야.
인류 역사상 상위 0.0001%의 삶
죽을 고비도 주지 못했던 교훈을 현타를 통해 얻은 게 좀 민망하긴 하지만, 나 사실 하루에 한 번은 세상에 감사한 마음을 되새기곤 해. 샤워할 때.
" 내가 하필이면 밀레니얼 시대에 태어나, 하필이면 대한민국이라는 땅에 살고, 하필이면 큰 사고나 병으로 죽지 않고 살아온 덕분에 이렇게 깨끗하고 따뜻한 물을 돈 걱정 없이 쓸 수 있는 것이다. 인류 역사상 이 정도로 풍족하고 안전한 삶을 당연히 누리는 인간이 얼마나 있었을까?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먹을 수 있는 것도 모자라, 조선시대 왕도 못 먹었을 고급 음식을 손가락 몇 개 틱틱 거려서 배달해 먹고,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비행기를 타든 배를 타든 기차를 타든 어떻게든 갈 수 있고, 인터넷도 너무 발달해서 온라인으로 물건을 사고 팔 수 있는 현재까지 인류 역사의 최정점에 있는 삶이다. "
아침마다 감사도 이런 감사가 없고 호들갑도 이런 호들갑이 없다. 매일 아침 이렇게 예수한테 직접 세례 받듯 샤워하다가 조금만 좌절하면 바로 불만 터지는 것도 엄청 웃긴 일이야. 그게 나라는 얄팍한 인간인 거겠지. 뭐 어쩌겠어, 이렇게 덕업일치 같은 거 한 번 더 쓰면서 또 다짐하는거야. 내가 할 수 있는 것까지만 생각하고 그 이상의 것으로 인해 힘들어하지 않겠다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적으면? 그 또한 어쩔 수 없지. 안 좋은 결과가 또 닥쳐와? 그냥 받아들여야지, 뭐.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아침 깨끗한 물로 샤워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안소현 - 햇빛 좋은 날 걷는 것은 모든 것을 괜찮게 해
덕업일치 Issue No.8의 커버로 선보인 작품은 엘디프 아트레이블L 소속 안소현 작가의 <햇빛 좋은 날 걷는 것은 모든 것을 괜찮게 해>이다. 안소현 작가의 작품을 처음 본 것은 분당 정자동 어느 건물 지하에 있는 갤러리에서다. 혼자서 엘디프를 꾸려가다보니 생각만 많고 진도는 나가지 않던 그 시절, '아-' 하는 아찔한 탄성과 함께 보았던 <모과와 선인장>, <0의 휴식>, <화분의 방>은 여전히 내게 직설적이고 직접적인 충격이다. 그 이후로 늘 이 작가의 그림과 글을 보고 읽을 때마다 나는 갖고 싶은 미래에 목매단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한참을 부끄러웠다. 작가의 그림은 '내 삶은 고달팠지만 그래서 아름다울 수 있답니다'라고 말해주었는데 나는 늘 '내 삶이 고달파지는 한이 있더라도 아름다워질 것이다'라고 스스로의 팔다리를 비틀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오늘은 이 그림 속 자박자박 걸어가는 어느 신사의 팔 다리의 경쾌함과, 그 모자에 쏟아지는 따스한 온도, 그리고 제목에서 느껴지는 소박한 감사를 찰나라도 나의 것으로 만들어보고 싶어 썸네일을 만든 후 작업 노트를 읽고 옮기다 이내 눈물을 팡 터뜨린다.
작가 노트 - 햇빛 좋은 날 걷는 것은 모든 것을 괜찮게 해, 24.2x40.9cm, 2019
때때로 과거의 아픈 기억이 떠오르고 미래의 불안과 걱정들에 휩싸여 현실 속에 온전히 놓여있지 못할 때가 있다. 이미 지나간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느라 존재하지 않는 시간 속에서 방황하며 살고 있는 허망한 기분. 현실이 초 단위의 시계로 나뉘어 흘러가는 찰나의 순간이기 때문일까. 그 찰나에 맞춰 모든 것이 빠르게 움직이고 일사천리 되는 사회의 속도 앞에서 나는 점점 멍청해지는 기분도 든다. 제대로 만끽하고 느낄 새도 없이 휩쓸려가느라 자아를 잃고 비슷해져 버리는 것 같은 세상과 사람들. 이런 혼란과 불안함 가운데에 있다 보니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사실 잘 모를 때가 있다. 가만히 생각해 볼 겨를 조차 막막하고 두려워, 단지 그냥 이 불안함에서 벗어나 안정된 마음을 얻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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