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나 양벼락이야.

요즘 비가 좀 내렸지? 나는 물리적 저기압의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는 신체를 가지고 있어서, 늦잠 잤다 하면 비 오는 날이더라. 이번 주는 시작부터 비가 내렸어. 덕분에 나는 아이들 등원은 다 남편에게 미룬 채 늑장을 부렸고, 주말~월요일 동안 세 군데에서 제안서 탈락 소식을 받으면서 그 바운스에 몸을 맡기는 하루를 보냈어. 손이 가는 대로 책도 읽어보고, 소파에 찌그러져 앉아서 핸드폰으로 이것 저것 찾아 보고, 거실의 불을 다 꺼 놓고 먹먹한 구름을 보며 멍도 때려보고, 엘디프 카톡 방에 실없는 농담이나 늘어놓으면서 시간을 다소 허비했지.


어떤 사람들은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고 현재의 실패에 literally 영향을 받지 않기도 해. 참 멋져. 자신에 대한 풍부한 믿음이 있다 보니까 이 모든 것은 과정일 뿐이고, 나는 타인과 경쟁하는 것이 아닌 어제의 나와 경쟁해서 더 나은 오늘의 나를 만들면 된다고 생각하지. 자신의 단점보다는 장점에 초점을 맞추면서 일을 진행하는 타입의 사람들이다 보니 자신에 대한 타인의 평가에 큰 영향을 받지 않아. 무언가를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이번 건 지나갔고 다음에 더 좋은 기회가 올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너무너무 부러워하는 멘탈이야. 그런데 나는 그런 사람이 못 되더라고.


오늘은, 사업을 하면서 늘 내 옆에 함께하는 '실패'를 대하는 내 태도를 글감으로 삼아볼거야.

다소 기쁜 주제는 아니지만 (그리고 언제나처럼 아무도 읽지 않겠지만ㅋㅋㅋㅋ) 한 번 떠들어볼게!


사적인 듯 예술적인, 덕업일치 - Issue No.5

경기침체와 긍정 주문 세뇌하기

콩알 만한 간을 가진 CEO

지난 편 덕업일치에서 떠들어 댄 내용을 다시 상기해보면, 나는 그렇게 큰 도전도 하지 않았고 그래서 큰 실패도 안 해봤다고 말해야 할 것 같아. 융자나 투자를 받는 등 큰 도전을 안 한 이유는 겁이 많아서라고 이실직고 했던 기억도 나네. 개인적으로 실패를 받아들이는 내공이 부족하다 보니 두려움이 큰 것 같아. 내가 사업하면서 더 뼈저리게 깨닫게 된 것이 있어. 나는 내가 닥친 문제를 '최대한 보수적'으로 분석하고 '타인과 나의 비교'를 통해 내 단점을 정확히 찾아내는 과정을 거치면서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고 개선할 것인가 고민'하는 방식을 택하며 살아왔더라고. 원인을 분석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건 아주 당연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이 과정이 가진 가장 큰 단점은, 비교와 반성이 무조건 수반되는 방식이라는 점이야. 말이 좋아서 반성이지 자책이 되는 경우가 많더라고. 그래서 내 지인들은 "너 그 정도면 충분히 잘 하고 있는데 왜?"라고 반문하지만 난 늘 내가 부족하게 느껴져.


근데 그 보수적이고 비판적인 성격이 나한테만 적용되겠어? 우리 멤버들의 업무의 빈틈을 발견하고 수정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내 업무 중 많은 부분을 차지해. 오타, 줄간격 맞추기, 사진 각 맞추기, 용어, 색깔 같은 사소한 부분부터 시작해서 전체적인 운영의 흐름을 잡아주거나 업무를 진행하는 방법을 개선하거나 새로운 기준이나 방법을 생각해내고 눈에 보이는 결과물(도식화, 문서화 등)로 만들어서 공유하거나 새 사업을 구상해서 추진하는 것들이 내가 주로 힘을 쏟는 부분이야. 그러다 보니 눈에 보일 때마다 수정을 요구하거나 멤버들의 의견을 물어봐서 귀찮게 하곤 하지. 다행히 우리 멤버들은 나의 이런 부분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성적으로 받아들이는, 심지어 나의 이런 점을 잘 활용하는 성숙한 사람들이라서 우리 엘디프가 하하호호 웃으면서 일할 수 있는 거 같아.


그래서 나는 엘디프 안팎으로 일어나는 문제를 대할 때 보수적이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나의 이 습관을 맘 놓고 사용하고 있어. 이게 언제 미친 듯이 발현되냐면, 내 기준에서 아주 군침 도는 사업을 따내고 싶을 때야. 나는 제안서나 발표를 준비할 때 정말 나 스스로가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 내가 나에게 질문을 해도 내가 설득력 있는 대답을 낼 수 있을 정도로 고민하고 연습하지 않으면 못 견뎌. (체력이 허락하는 한) 몇 날 밤을 새서라도 내 맘에 들 때까지 준비해. 특히 3분~5분 내에 엄청나게 많은 정보를 PPT와 내 목소리로 전해야 할 때 가장 심장 쫄려하는 성격인데, 6시간이든 10시간이든 대본과 PPT를 수정하고 내 목소리를 듣고 또 들으면서 발표장 안에 들어가기 전까지 중얼중얼 거리다가 들어가서 마이크를 들어. 다행스럽게도 그렇게 제안하는 내용들은 좋은 점수로 통과가 되더라.


문제는 작년부터 내 태도에 문제가 생겼다는 거야.

임신, 출산, 육아. 그리고 경기침체.

엘디프를 시작할 때는 결혼만 한 홀몸(!)이었어. 자상하면서도 도전의식 있는 남편을 만난 덕에 안정적인 직장을 때려 치고 창업이라는 영역에 들어왔지. 개인사업자로 엘디프를 창업하고, 1년 후에 법인으로 전환하면서 서서히 성장해온 엘디프와 나는 큰 산을 만났다. 바로 내가 엄마가 되었다는 거야. 임신 기간엔 입덧과 현기증으로, 출산 때는 조산과 산후 출혈로, 육아는 쌍둥이 육아를 하게 되는 바람에 나의 2022년 1분기 성과에서 엘디프의 지분은 10%도 되지 못했어. 내가 하는 중요한 업무 중 하나는 '월말 저작권료 정산'인데, 12월 중순에 조산을 하고 산후출혈을 겪으면서 병원에 입원해있던 그 한 달만 제외하고 다시 정산 업무에 복귀할 정도로 회사에 대한 애정이 컸다. 1월 중순부터는 바로 재택을 시작했고 2월부터 주1회, 3월은 주2회 출근을 목표하면서 아이들을 키웠지. 4월부터는 내 인생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의 은인인 아이돌봄 선생님을 만나게 되면서 주2회 출근을 정착시킬 수 있었고 재택 근무도 나름 원활하게 했어. 몸과 마음이 지칠 때도 있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희열이 정말 컸어.


그런데 2022년 하반기부터 2023년 하반기까지 우리 엘디프는 되게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우리 같이 작은 기업일 수록 경기 흐름의 영향을 크게 받더라고. 당장에 팔리던 것들이 팔리지 않았고 나는 여태까지 해왔던 것처럼 판매 추이, 마케팅 효율, CS 내용 등을 열심히 찾아보고 분석해 봤지만 문제점을 찾기가 힘들더라고. 원인을 모르니까 해결 방법을 도출해내기도 어려웠어. 그런데 하나가 달랐다면, 마케팅 설정을 바꾸지 않았는데 마케팅 비용이 줄어들었다는 거야. 노출 대비 클릭률이 낮아졌고 클릭 대비 매출액이 적어진 것이지. 덜 검색하고 덜 클릭하고 덜 결제하는 상황이었던 거야. 남들은 이런 걸 경기침체라고 하더라. 그런데 나는 그 원인은 받아들일 수 없었어. 경기침체라고 해서 내가 죽어버릴 순 없잖아? 그래서 끊임없이 고민했지만 점점 더 내 안에서 외치는 소리와 싸우느라 힘이 들기 시작했어. '너가 육아로 지쳤다는 핑계를 대지 않고 조금이라도 더 짬을 내서 열심히 일했더라면, 다른 팀원들이 하는 만큼이라도 집중했다면, 더 능력있고 더 치밀한 사람이었다면 이런 결과는 없었을 거야!'

긍정 주문 세뇌하기

그래서 나는 나와 다른 사람들을 흉내 내기 시작했어. 위에서 말한 내가 닮고 싶어하는 낙관적인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주문처럼 외웠지.


- 이 모든 것은 과정일 뿐이고, 종국에는 좋은 미래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 나는 타인과 경쟁하는 것이 아닌 어제의 나와 경쟁해서 더 나은 오늘의 나를 만들면 된다.

- 나는 이러저러한 장점이 있고 그래서 나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은 나를 선택할 것이고 못 알아보는 사람은 외면할 것이다.

- 타인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 나와의 경쟁만 생각한다.

- 이번에는 실패했지만 다음에 더 좋은 기회가 올 것이다.


나의 동료들이 모두 나를 지지해주었고, 내가 잠시라도 저 주문을 외우지 못하고 있으면 그들이 나서서 다시 한 번 내가 좌절하지 않게 부축해 주었어(나는 정말 인복이 있어.) 나의 상태는 차츰차츰 좋아졌어. 나는 점점 내 마음의 여유를 찾아가기 시작했고, 육아와 사업을 병행할 수 있는 이 멋진 환경에 다시 한 번 더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았지. 자잘한 실패의 나날들이 이어졌지만 #중꺾마 #존버는승리한다 를 외치면서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더 나은 미래가 반드시 올 거라고 믿으며 살기 시작했어.


그런데 웬 걸. 어느 순간 내 퍼포먼스가 예전 같지 않더라. 문제를 발견하면 득달같이 달려가서 수정하려고 하던 불독 같은 성격이 어느 새인가 긍정을 넘어서서 '알이즈웰~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바뀌더라고. 긍정적인 마인드를 유지한답시고 했던 노력이 지나쳤는지 올바른 균형을 잡지 못한 거야. 밤을 새서라도 맘에 들 때까지 제안서를 써내던 독한 양벼락은 사라지고 대충 재작년, 작년에 썼던 내용 복붙 해서 기한 맞춰 내보내기 바빴고, 새로운 아이디어도 새로운 제품 개발도 충분히 고민해보지 않고 내가 아는 선에서 쉽게 쉽게 쳐내면서 대충 때우려고 하더라고. 제안서 쓰면서도 난 알았어. '아 이거 논리가 부족한데, 데이터가 부족한데, 설득력이 부족한데...' 발표 준비 하면서도 난 알았어. '아 이거 대충 때우다가 생각지도 못한 질문 나오면 답변 잘 못하겠는데...'


결과는 피할 수 없었어. 월요일 하루 동안 두 개 제안서가 서류 탈락하고 하나의 최종 발표 평가에서 탈락했다는 통보를 받았지. 이렇게 몰빵으로 탈락한 적은 처음이었어.

보수적이고 비관적인 자기 평가의 힘

그건 내가 아니야.

약간은 어두컴컴한 거실에서 혼자 생각을 해봤어. 와, 이거 뭐지? 이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사실 2023년 상반기에도 '예상하고 있었던 탈락'을 경험했었는데 그 때는 주변의 긍정문에 동의하는 척 하면서 씁쓸하게 현실을 외면했었어. 낙담하긴 했었어. 떨어질 줄 알았는데도 떨어지니까 더더욱 내 잘못 같았어. 내가 퍼포먼스를 잘 내지 못해서, 내가 엘디프에 전심전력을 다 하지 못해서, 기획서를 대충 써서... 그래도 그 땐 딱 한 번이었어. 나는 동료들의 힘을 빌어서 긍정 주문 세뇌를 했고 씁쓸함을 잊어갔지. 다행히 2023년 하반기에는 다른 프로젝트들이 잘 진행되면서 덕분에 생각지 못한 결과물들을 만들어서 바쁘게 보낸 덕분에 긍정 주문 세뇌는 계속 될 수 있었지.


그런데 지난 월요일은 좀 달랐어. 약 2년 동안 강제로 골방에 들어가 있었던 원래의 내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어.


- 나를 제3자의 눈으로 평가하고 내가 내 편을 들지 않은 채로 상황을 판단할 수 있는 내 고유의 능력을 왜 외면해야 할까?

- 난 태생적으로 내 인생 자체에 대해 낙관적으로 생각하며 살아오던 사람이었는데, 오늘 내 눈 앞에 보이는 문제까지도 '긍정'이라는 단어 뒤에 숨어서 모른 척 하는 것이 좋은 것인가?

- 아니 그게 정말 내 입장에서 긍정적인 상태이긴 한 건가? 그렇게라도 내 마음이 편하기를 내가 원하는가?

- 집요하게 기획안을 수정하고 자료를 수집하며 나 자신이 납득할 때까지 논리를 고치고 고치고 고쳐서 상대방을 설득하던 사람이 긍정 주문 외운다고 상대를 설득할 수 있어지나?

- 나는 치열하게 고민하고 결론을 내리고 방법을 고안해내서 그것을 실행하는 것을 기뻐하던 사람 아닌가?

- 타인과 경쟁 좀 하면 어떤가? 경쟁에서 스트레스 좀 받으면 어떤가? 그 끝에 거머쥐는 성취의 달콤함이 나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아니었나?


긍정 주문을 세뇌하는 거 상당히 좋은 방법일 수 있고 나에게도 효과가 일부분 있었지만, 그건 내가 아니더라고.

나답게 분석하고 나답게 해결하기

난 그냥 나의 생각을 누르지 않고 내가 평생 살아왔던 방식대로 현상을 보기로 했어. 문제가 생기면 원인을 찾고, 원인을 찾으면 해결 방법을 모색하기로. 모든 것이 다 잘 될 거라고 믿으면서 실패한 것은 흘려보내고 그 다음 기회를 기다리는 방식은 내 마음이 편치 않더라고. 나는 실패를 분석하고 나 스스로 납득해야 그 다음으로 나갈 수 있는 사람인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솔의눈 마신 것처럼 식도가 시원해지더라고. 그 길로 우리 회사 공동대표에게 카톡을 보냈어.


- 뭐, 뭔가 부족해서 떨어진 거겠지 뭐

- 나는 멀쩡한데 나를 몰라주는 니들이 이상하다 이렇게는 생각 안할란다 나는 ㅋ

- 그건 내 스타일 아니야 정신승리 하는 느낌 싫음

- 그냥 문제를 덮어놓고 가는 거 같아서 싫다 ㅋ

- 받아들이고 문제를 해결하겠음

- (그 뒤로 이래서 떨어진 것 같다 블라블라)

- (그래서 매출을 다시 정상화하고 더 다채로운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기획안은 날려쓰지 않을거고 내가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수정할 것이며 블라블라)


나는 내 속의 냉랭하고 뻣뻣한 실 한 줄과 불로 촘촘히 소독한 뾰족한 바늘을 꺼내서 문제와 원인이라는 구슬들을 하나하나 찾아 내어 꿰어 갔고, 구슬이 잔뜩 꿰어진 실을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려서 매듭을 지어보았어. 그랬더니 투닥투닥 하지만 대충 차고 다녀도 부끄럽진 않은 팔찌가 하나 만들어지더라고. 그 팔찌를 보면서 생각했어. 그래, 이게 내 거지.

보수적이고 비판적인 자기 평가의 힘

토스 창업자 분의 강연을 접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분은 그러시더라고. 무슨 일을 할 때 하도 실패를 많이 해서 뭘 해도 잘 될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대. 처음에는 사용자가 1000명도 안 되는 서비스를 만들면서 '아~ 이렇게 좋은 걸 도대체 사람들이 왜 안 쓸까?'라고 생각했대. 그런데 계속된 실패에 너무 이골이 나다보니까 본인들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제품이나 서비스를 볼 때도 '이거 누가 써주기는 할까, 그래도 한 번 해보자.'라는 마음이 드는 지경에 이르렀대. 늘 새로운 제품이나 서비스에 대해서 보수적이고 비관적인 입장을 취할 수 밖에 없었다는 거야. 그렇게 아무런 기대감 없이, 심지어 토스 서비스가 말도 안되는 미완성 상태일 때 온라인 프로모션을 시작했는데 광고 효율이 너무 좋았대. 토스 대표님은 '어? 이거 왜 이러지? 서비스가 완전 미완성인데 이상하게 데이터는 잘 나오네? 그럼 그냥 이 결과 값에 맞춰서 한 발 더 가보자.' 이런 식으로 토스 서비스를 발전시켜 나갔다는 거야.


어느 날 지인 분이 회사 근처에 놀러 오셔서 같이 이야기를 할 기회가 생겼고 그 지인 분이 요즘은 어떤 아이템을 하고 있냐고 물어봤대. '아 요즘 뭐 그냥.. 이런 송수금 서비스를 만들어서 알리고 있는데 그냥 반응이 괜찮아서 그 반응에 맞춰서 하나씩 만들어가고 있습니다.'라고 겸손하게 이야기를 하게 되더래. 그 전에는 본인이 하는 서비스가 얼마나 좋은지, 앞으로 어떤 좋은 결과가 있을지를 말하는 것이 강한 모습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때의 본인은 본인의 약점도 솔직히 말할 줄 알고 결과에 대해서도 담백하게 전달할 뿐 군더더기를 붙이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는 거야. 그런데 그 지인 분께서 초기 토스 서비스를 보더니 '돈 냄새가 풀풀 나네~'라고 말해주어서 처음 깨달았다는 거야. 토스가 사람들이 원하는 서비스였다는 걸.


그 강연을 들으며 어렴풋이 나의 상황을 대입해봤어. 너무 대단한 창업자 분이시고 그 분이 한 경험을 내가 해본 적은 없지만 수긍이 가는 부분이 있었어. 맞아, 보수적이고 비판적인 것이 꼭 나쁜 건 아닐 수 있어. 하지만 많은 경우, 나나 회사가 만들어낸 것에 대해 보수적으로 분석하고 비판하다 보면 내 자신도, 상대방도 마음이 상하곤 해. 나를 비판하다 보면 '난 이 정도 밖에 안되는 인간인가' 싶고, 다른 사람의 결과물을 보수적으로 뜯어보고 있으면 상대방으로서는 '열심히 만들었는데 왜 맘에 안 들어하지?'라고 여길 수 있지. 하지만 그렇게 해서 더 좋은 결과물이 나오면 신기하게도 그 고통스러웠던 과정이 다 추억이 되곤 하더라. 그런 경험들이 축적되면서 서로 간의 커뮤니케이션 방법이 더 부드러워지고 신뢰를 바탕으로 한 프로젝트 운영이 가능하게 된다는 점은 정말 짜릿하기까지 해. 우리 엘디프 속에서도 내가 나 자신을 힘들게 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날카롭게 말하는 부분만 잘 컨트롤 할 수 있다면, 이런 나의 성격은 다른 긍정적인 엘디프 멤버들과 잘 어우러져서 더 완성도 있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아. 이건 내 장점이고 엘디프에 꼭 필요한 부분이었던 거야. (그렇게 생각 안 하는 멤버들이 있다면 미안해... 그래도 하여간 이 텐션으로 잘 해볼게 ㅎㅎㅎㅎ)

내일에 대한 긍정, 오늘에 대한 비판.

나란 인간은 세상에 엄청난 업적을 남기기에는 모험심도 용기도 판단력도 부족하지만 나는 나의 미래에 대해서는 정말 근거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긴 해. 그냥 그렇게 믿어지는 거 같아. 그 믿음은 사실 현재에 대한 긍정에서 비롯되는 것 같아. 나는 아침 저녁으로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할 때마다 정말 나의 삶에 대해 감사하다는 생각을 해. 그러니까 말 그대로 매일매일 그런 생각을 해. 인류 전 역사를 돌아봐도 지금처럼 부유한 때가 없었는데 심지어 내 영혼은 얼마나 로또를 맞았는지 이 부유한 시대에 또 대한민국이라는 땅에 터를 잡아서(조금만 더 북쪽에 자리 잡았어 봐, 끔찍하지) 언제든 이렇게 깨끗하고 따뜻한 물로 몸을 씻는 사치를 부리는구나. 조선시대 왕도 나만큼 좋은 거 못 먹었을 것 같고, 과학기술이 너무 발달해준 덕분에 나 같은 서민도 차를 끌고 다닐 수 있어서 가고 싶은 곳 웬만하면 다 갈 수 있고, 아니 다 중저가이긴 하지만 옷도 도대체 몇 개야? 인터넷이 너무 발달해서 거의 무자본으로 시작했는데도 밥 벌어 먹을 수 있는 환경이라는 것에 너무 감사해. 나는 진정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이후로 상위 0.00001%의 인간으로서 살고 있다고 생각해. 그래서 조금만 더 노력해도 더 나은 삶을 만들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다고 믿고, 그래서 내 미래는 너무 밝고 아름다울 거라고 믿어.


그렇지만 문제를 대할 때 만큼은 비판적 자세를 취하는 성격일 뿐인 거지. 치열하게 고민하다 보니 당연히 스트레스가 수반되는 것이고. 나의 이 긍정적인 현재의 유지와 더 긍정적일 미래의 도래를 위하다 보니 한 번 더 나와 엘디프를 점검하던 거였는데 육아를 핑계로, 내 마음의 일시적 안정을 위해서 내 장점을 억누르고 있었던 거야. 때로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다 보니 너무 멋지게 사업하는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스스로 쭈구리가 되기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는 우리가 어떤 점에서 다른 회사인지 더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한 거지.


아무래도 나는 그냥 이런 굴레 속에서 살아야 하는 운명인 것 같아. 이 굴레가 나를 너무 좀먹거나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균형을 잘 잡아가다 보면 엘디프도 언젠가는 이름만 대면 아는 그런 회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핑크빛 미래를 상상하며(긍정) 이 지독히 사적이고 사적인 덕업일치를 우당탕탕 마무리해볼게(비판)!

박유진 - 응시

덕업일치 Issue No.5의 커버로 선보인 작품은 엘디프 박유진 작가의 <응시>이다. 박유진 작가와는 직접 대면한 적이 없어 차분한 그림체, 단정한 프로필 사진, 통찰력 있는 작업노트를 통해 그 품성을 상상해 볼 뿐이다. 박 작가를 유독 기억하는 이유는 '순환'이라는 제목과 '윤회'라는 작품 덕이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보며 살지만 결국 보이지 않는 것들로 인해 사는 사람들 중 하나로서 삶의 본질은 무엇이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와 같은 필생의 질문들을 제기하는 것으로 삶의 정수를 담고자 하였다." 사람과 사람이 속한 거대한 흐름에 대한 연결적 속성에 대한 깊은 고민이 느껴지지 않을 수 없는 문장이다. 결국 박 작가가 말하듯 작가 스스로의 정신적 수행의 결과물로서의 그림이 전달해주는 그 메세지가 내 마음에 박혔다고 말하면 너무 진부한 표현이 될까? 나는 박 작가의 작품과 작업노트를 보면 볼 수록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지는 이 마음이 참 생경하다. 이번 덕업일치를 읽은 후 다시 보게 된 이 <응시>라는 작품과 그 작업노트는 더더욱 특별하다. 안 되겠다, 이 작품 원화는 판매가 완료되었다고 하니 지금 당장 에디션이라도 소장해야겠다.


작가 노트 - 응시, 45x70cm, 2021

넓은 갈대 들판에서 홀로 가운데에 서 있는 여자는 이쪽을 향해 응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물의 뒤로 희미하게 무지개가 떠 있습니다. 무지개는 외부적인 허상을 의미합니다. 여자는 언제 잡힐지 모르는 허상같은 무지개를 향해 가는 것을 멈추고 자신의 내면을 향해 시선을 바꾸게 됩니다. 외면만을 좇다가 어느 순간 자신이 그동안 놓치고 있던 사실은 가장 중요한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는 모습을 담은 작품입니다.

Back Issues.

페이스북
카카오톡
네이버 블로그
밴드
floating-button-im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