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나 양벼락이야.
4월이 되었어.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들 하지만 목련은 올해도 예쁘고 벚꽃은 벌써 비 맞아서 꽃길을 만들어버렸지. 엘디프의 올해 4월은 다행히도 화창해지는 중인 것 같아. 2023년 4월을 생각하면 정신이 바짝 들고, 올해의 이 회복되는 느낌이 언제 사라질지 몰라 약간의 불안함 속에 있어서 이 훈훈함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나 봐.
2023년 봄의 나는 '내가 무엇을 놓쳤을까?'를 늘 고민하며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있었지만 2024년 봄의 나는 '나는 충분히 잘 하고 있다'라고 스스로를 도닥일 수 있는 능력이 쬐끔 생기게 되었다고 하면 오늘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느낌이 전달 될까 싶다. 바로, '대출과 투자 없이 스타트업 하기'야. 일반적으로 '스타트업'은 혁신적인 기술을 바탕으로 빠르게 성장하고(고성장), 불확실성에 도전하지만(고위험), 돈은 잘 버는(고수익) 신생기업으로 정의돼. 그런데 요즘은 '혁신'이라는 단어가 대변하는 영역이 비단 기술 뿐만 아니라 사회 문제 해결, 새로운 시장 개척이나 새로운 유통 모델 제시 등 아이디어적인 측면도 커버하고 있어서 단순 유통, 제조와 같은 전통 오브 전통 사업만 아니라면 스타트업으로 분류될 가능성이 높아진 것 같아. 이렇게 '스타트업이라는 단어가 어디까지 커버치느냐'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어. 그런데 '스타트업은 돈이 없다'라고 말하는 건... 웬만하면 이견이 없을 것 같아. 그러니 '대출 혹은 투자'(앞으론 '융투자' 혹은 '융투'라고 할게)는 스타트업과 늘 함께하는 그림자 같은 존재인 것이지. 그런데 융투 없이 스타트업을 한다? 그건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해. 엘디프가 바로 그런 스타트업이야.
엘디프의 은밀한 부분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는 주제라서 이 이야기를 꺼낼까 말까 고민이 좀 있었는데
어차피 아무도 안 읽고 나만 떠들고 말 거니까ㅋㅋㅋㅋㅋ 오늘도 신나게 떠들어볼게!
사적인 듯 예술적인, 덕업일치 - Issue No.4
융투자 없이 스타트업 하기
스타트업 운영 성과 중 하나, 융투자
이게 참 웃기지만, 돈이 돈을 버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융투자를 얻어낸다는 건 그 스타트업이 경제적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훈장이기도 해. 아 물론 신용대출이면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사업화 자금으로 은행권에서 대출을 해줬거나 액셀러레이터의 투자를 받았다면 그 스타트업은 어느 정도의 궤도에 올랐다고 볼 수 있어. 융투가 성행하는 시기에라도, 돈은 돈 되는 곳에 머무르게 되는 거 같아. 스타트업 입장에서 대출은 상환의무가 있고, (나는 투자도 상환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일반적으로 투자는 망하면 날릴 수도 있는 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대출보다는 투자를 선호하게 되는 거 같아. 그래서 많은 기관이나 기업들이 스타트업을 평가할 때 기존에 투자를 받은 경험이 있는지 물어보는 거겠지. 누구나 처음으로 남들이 안 가본 길을 가는 건 무섭잖아.
엘디프는 왜 융자를 받지 않을까?
융자를 받는 것의 가장 좋은 점은 지분을 방어하면서도 외부에서 자금을 유치할 수 있다는 것 같아. 그리고 회사의 실적이 좋다고 해서 그 실적에 비례하는 수익을 은행에 제공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빌린 돈 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아주 좋은 자금 유치 방안이야. 대신 다달이 이자가 발생해서 고정 비용이 높아지고, 원리금을 갚지 않으면 대표가 신용불량자로 전락하는 연대 보증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적은 종류의 상품을 대량으로 제작해서 객단가를 낮추는 대신에 빠른 시간 내에 그 상품들을 대부분 판매해 낼 수 있다면 제작비를 융자로 끌어오는 것이 좋은 선택인 것 같아.
엘디프가 융자를 받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생산에 들어가는 생산 비용을 최대한 줄이는 전략을 선택했기 때문이야. 물론 돈이 없어서 많은 비용을 들일 수도 없었어. 사설이지만 나 처음 엘디프 창업할 때 꼴랑 100만원 들고 시작했고, 심지어 그 100만원 중에 40만원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님 작품 구매하는 데 플렉스 했었다! ㅋㅋㅋ 포토샵도 못하는 애가 유튜브 보면서 상세페이지 만들고, 주문 들어오면 혼자 꼼지락 꼼지락 액자 만들어서 포장하고, 우체국까지 이따 만한 박스들 들고 가서 일일이 손으로 송장 써서 배송하던 사업이 여기까지 왔다고 하면 믿어져? 돈이 없으니까 정말 생산 비용을 낮추지 않을 수 없더라고.
그래서 생각해낸 묘안(?)이 '작품 하나가 판매되면 순수익의 최대 50%를 아티스트의 저작권료로 분배한다'는 예술공정거래라는 개념이야. 저작권료를 선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판매되면 저작권료를 지급하는 것이지. 저작권료가 시장 평균 대비 2~5배 정도 되기 때문에 상품 한 개 당 콘텐츠 생산 비용이 비교적 높은 편이긴 하지만 판매 후에 지급한다는 점이 우선적으로 많은 돈을 끌어오지 않아도 사업을 운영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더라고. 게다가 한국을 대표하는 우리 작가님들께서 기존에 창작해 놓으신 작품의 저작권을 이용하는 계약을 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작품을 생산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점도 하나의 이유가 되겠다. 가끔 인터뷰를 하게 되면 사회적으로 해결하고 싶은 문제가 있어서 '예술공정거래'를 시작했냐는 질문을 받는데, 난 늘 솔직하게 말해. 그런 거창한 이유는 처음에도 지금도 없고, 내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상생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고.
두 번째는 주문 후 생산하는 방법을 적용한거야. 아까 내가 상단에서 말한 것처럼 대량 생산을 하면 객단가가 낮아져서 같은 가격이라도 마진이 높아지지만 초반에 들여야 되는 비용이 높아지게 돼. 우리는 마진을 조금 포기하는 대신 판매가 되면 제작을 시작하는 주문 후 생산을 통해서 재고 관리의 부담을 덜었지. 반품이 되면 재고가 생기지만, 실제로 반품 재고는 전시나 협찬으로 소화했기 때문에 재고가 거의 제로에 가깝다구. (잠시 노파심에 말하자면, 주문 후 생산은 주문제작 상품이랑은 다른거야. 간혹 주문 후 생산하기 때문에 생산이 시작되면 반품 안된다고 하는 회사들이 있는데, 우리나라 인터넷상거래법 상 판매자가 제시한 옵션(사이즈, 액자 색상 등등)을 소비자가 선택해서 주문한 상품은 기성품 판매랑 같은 거라고 보면 돼.)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엘디프가 예술 콘텐츠를 다루는 기업이라서야. (이건 하던 이야기 계속 이어가다가 쩌~ 아래에서 더 이야기할게)
엘디프는 왜 투자를 받지 않을까?
투자는 시중 금리보다 더 낮은 이율로 자금을 융통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역시 지분을 나눠주면서 일부 경영과정에서 결재를 받아야하는 번거로운 일들이 생긴다는 단점이 있어. 흔히들 투자는 투자자가 리스크를 지는 것이고 스타트업은 그렇지 않은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투자자들은 엑시트 하는 기업에서 투자금과 이윤을 회수하기 때문인 것 같아.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융자보다는 상환 의무가 덜하다는 대단한 장점이 있다고 봐야겠지. 엘디프는 투자에 대한 의향이 없는 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속해 있는 씬이 가진 특성 때문에 나름 여러 VC들과 투자에 관한 논의를 할 기회를 가졌어. 어떤 VC랑 대화를 하면서 놀란 건 어떤 VC는 투자를 진행했더라도 스타트업이 엑시트 하기 전까지는 투자금을 매몰비용으로 생각하기도 하더라고. "왜 투자 안 받으세요? 그냥 1억 투자 받으시고 마음대로 쓰세요. 우리는 어떻게 쓰시는지는 전혀 상관 안해요!"라는 말까지 들어봤다니까.
그런데 나는 좀 겁이 많은 소시민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세상에 공짜 돈은 없다고 믿거든. 투자금은 상환전환우선주(RCPS, Redeemable Convertible Preference Shares), 전환사채(CB, Convertible Bond), 신주인수권부사채(BW, Bond with Warrant) 등으로 성격을 달리하는데, 아무리 봐도 단어 많은 단어들이 '나는 사채다!' 하고 외치고 있지? 실제로 이자율이 낮을 뿐 이자가 있긴 있더라구. 사채라는 말이 없는 상환전환우선주도 '상환'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압박감이 있어. 실제로 계약을 어떻게 맺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만기와 이자 조건이 붙는 것은 동일해. 우리 엘디프 멤버들은 '돈' 자체에 진짜 진지한 사람들이라서 '남의 돈'을 빌리겠다고 마음 먹는 것이 어렵더라구.
모든 이유를 막론하고, 엘디프가 투자를 안 받는 가장 큰 이유는 인력 투입이 적어도 운영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왔기 때문일 것 같아. 인건비는 고정비용이면서도 유동비용이고 다른 비용들에 비해 덩치감이 크지. 한 번 만들어 놓으면 쭉 존재하는 상품과는 다르게 인력은 지속적으로 비용이 들면서도 동시에 지속적으로 새로운 아웃풋을 낼 수 있는 매력적인 자원이기도 해. 물론 엘디프도 사람이 직접 개입해야 사업이 돌아가는 것은 맞지만 판매와 생산을 운영하는 절차들이 상당히 간소화 되어있어. 온라인 위주의 판매와 홍보를 하기 때문에 판매/홍보에 들어가는 인건비를 줄일 수 있고, 협력 기업들과 오랜 시간 신뢰를 쌓아오면서 소량 제작이라도 엘디프만의 패키지를 적용해서 제작/배송/AS 하고 있어서 제작 관련 인건비도 아웃소싱하고 있거든. 사람으로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공연/행사를 하는 회사들, 개발자를 대량 채용해서 온라인 서비스 자체를 만들어서 배포하는 회사들은 제품/서비스 자체를 사람으로 만들기 때문에 초기 비용은 물론 유지 비용이 높게 들어갈 수 밖에 없고 그러다 보니 외부에서 자본을 가져와야 하는 경우들이 발생하겠지. 아, 엘디프도 소속 작가님들, 즉 사람이 콘텐츠를 제작하기 때문에 제품/서비스를 사람이 만들기도 하지만, 기라성 같은 작가님들께서 기존에 창작해 놓으신 작품의 저작권을 이용하는 계약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인건비를 들이지 않고도 지속적으로 새로운 아웃풋을 낼 수 있다는 점이 아주 큰 이유가 되겠다.
그런데 우리랑 비슷한 구조를 가진 다른 예술 기업들도 대출이 없으면 투자를, 투자가 없으면 대출을, 아니면 둘 다를 끼고 있는 데가 많더라고. 리스크를 감수하고라도 빠른 시간에 사업을 크게 키우고 싶은 기업들이기 때문인 것 같아. 사업을 하는 데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과 시간을 들여야 하는데, 천천히 성장해서는 시장에서 영향력을 확보하기가 어렵다는 판단이 있어서 일거야. 실제로 투자를 받아서 사업을 운영하는 회사들이 멋진 구석이 있더라구. 뭔가 더 포부 있고 스케일 있어보이는 느낌 알지? 근데 나는 영향력은 갖고 싶은 욕심쟁이면서도, 아까도 말했지만 사실은 돈 앞에서 간이 콩알 만한 소시민이라서 그런 담대한 결정은 아직 내지리 못하였어. 히히.
융투자 없는 스타트업=자영업?
자영업이라는 말에는 되게 부정적인 뉘앙스가 있어. 자영업은 그냥 내가 피고용인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영업을 하면 자영업이 되는 것이라서 개인사업자와 법인사업자를 분류해서 개인사업자를 자영업자라고 부르는 것은 가능하겠다. 그런데 이익을 남기지 못하는 영세한 소규모 사업체 중에 개인사업자가 많아서 그런건지 그냥 소기업을 자영업이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 그래서 항간에 이런 말들을 하지, "내 돈으로 사업하면 자영업, 남의 돈으로 사업하면 스타트업." 개인/법인이라는 분류에 상관 없이 자금 조달을 하는 사업체는 자영업이 아니고 스타트업이라고 격상하는 느낌이 좀 있지? 실제로도 융투를 받은 경험이 있는 회사를 더 좋게 평가해주는 창업 씬의 분위기가 있는 것도 사실이고.
뭐 그래, 일단 이해하기 좋게 "내 돈으로 하면 자영업, 남의 돈으로 하면 스타트업"이라는 시쳇말을 가져와서 말해보자. 앞서 '스타트업'이란 무엇인가를 말하면서 고성장, 고위험, 고수익이라는 특성을 가진 신생기업이고 자본력이 딸리기 때문에 대부분 융투로 자금을 조달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는데, 정말 융투자 없는, 특히 투자 없는 스타트업은 자영업일까?
엘디프는 대출 없이, 투자 없이 사업을 시작했고 지금도 그렇게 운영하고 있어. 엑시트 할 수 있을지 말지 고민은 안중에도 없지만, 지분도 100% 우리가 가지고 있고 싶은 마음이 커. 엑시트 했을 때 이윤을 다 독식할거야! 라는 꿈 같은 뻘소리를 가끔 하긴 하는데 그건 그냥 일기장에만 적혀야 하는 중2병 같은 거고, 기왕 사업하는 거 다른 사람 눈치 보지 말고 우리끼리 하고 싶은 대로 재밌게 해보자는 방탕한 생각이 커서 그래.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풍부하면 풍부한 대로 그 상황에 맞춰서 Breakthrough 하면서 내공 있는 회사, 내공 있는 개인이 되고자 하는 욕구가 큰 거지. (...나만 그런거면 미안해, 동료들아ㅋㅋㅋ)
그래서 우리 롤모델은 지분 100프로를 지키면서도 좋은 실적을 내서 엄청난 금액에 인수된 '스타일난다', 마찬가지로 투자 없이도 큰 규모로 사업을 운영하고 있는 '코니Konny' 같은 회사들이야. 이 회사들이 융자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투자는 안 받은 건 확실하지. 그리고 이런 회사들을 자영업이라고 부르지는 않지?
달라도 너무 다른 예술 시장
개인 취향에 의해 결정되는 예술 소비
예전에 예술경영지원센터를 통해 브랜딩 컨설팅을 받게 되었는데 우리를 담당해주신 컨설턴트님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엘레멘트(LMNT)의 최장순 대표님이었어. (지금도 간혹 대표님 인스타를 염탐하면서 참 어마어마한 분이다! 라는 생각도 하지만, 마지막으로 말씀 나누면서 다음에는 같이 술 마시기로 했는데 그것도 벌써 6년이 지났네~라는 생각도 드네!) 아무튼 최 대표님께서 우리 엘디프의 당시 아이덴티티를 관통해서 보셨다는 것을 이 글을 쓰는 지금에서야 느껴. 유시민 전 장관이 본인을 '지식소매상'으로 소개하던 시절이었는데, 그것처럼 엘디프를 '예술소매상'이라는 단어로 홍보하는 것이 어떻냐는 제안을 하셨었거든. 예술공정거래, 예술소매상, 예술기획사... 우리를 표현하는 모든 단어에 예술이 붙다 보니 엘디프를 가장 색다르게 만드는 것은 '예술공정거래'라는 단어에 집중하자고 결론이 나긴 했지만, '소매상'이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았어. 위에서 말한 여러 이유로 소량 생산을 기반으로 한 B2C 매출 비중이 높은 구조를 갖고 있지.
아무래도 엘디프가 예술 시장, 그것도 시각 예술 분야에 몸담고 있어서 더 그런 것 같아. 시각 예술이라는 컨텐츠가 가진 생래적인 특성과 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표현 방식 덕분에 소매업의 형태를 취할 수 밖에 없는거지. 한 편에서는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으로 만든 굿즈들이 나오자마자 완판 행진을 이어가고 그 작가의 원화는 없어서 못 팔지만, 또 다른 한 편으로 예술 소비는 남이 좋다고 해서 나도 동요하는 분야는 아니거든. 각 콜렉터의 개인적 취향을 많이 타는 분야다 보니까 더욱 소매의 구조를 띄게 되는 것이지. 다양한 갤러리들이 다양한 스타일의 작품을 소개하는 이유도 그 때문일 거야. 사실 시각 예술 시장에 있는 정말 많은 기업들은 '예술소매상'인 거지. 그 말인 즉슨, 예술 시장은 소비자가 여러 세그먼트로 엄청 세세하게 분절되어 있다는 뜻이야. 취향이 너무 다양해서 대표 상품이랄 게 없어. 소비자 타겟을 설정하기가 어려워. 시장 자체가 어느 정도 규모인지 알기가 어려워.
예술 시장에 대한 정의가 어렵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되게 Risky 하게 느껴지겠지?
꼭 필요하지 않은, 절대적 사치재
툭 까놓고 이야기하면, 예술은 그냥 사치재야. "ㅇㅇ이 밥 먹여주냐?"라는 질문에 예술을 대입해봐. 예술품 산다고 의식주가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 그건 인정해야 돼. 그럼 한 다리 더 건너서, 필수재에 예술을 얹는 아트콜라보레이션을 통해 제품이 탄생했다고 쳐 봐. 아트콜라보 그릇, 아트콜라보 아파트, 아트콜라보 자켓. 협업에 들어가는 비용과 저작권료 등등... 같은 재질의 같은 상품보다 더 비싼 가격을 매기는 건 당연하지. 그냥 예술이 끼어 들어가면 비싸져. 사치재라서 그냥 비싸, 이유 없어.
반면 요즘 투자 잘 받거나 인수된 기업들은 필수재 그 자체로 사업을 하지. 컬리와 배민은 음식, 호갱노노는 부동산, 런드리고는 세탁. 다 의식주랑 관련있어. 스타트업만 그런 거 아니고 돈 잘 버는 대기업들도 마찬가지야. 이제는 내 몸과 같은 핸드폰, 자동차, 대형마트, 포털사이트... 가격 경쟁을 할 수 있고, 없어서는 안 될 상품들이야. 아직까지 예술 스타트업들의 사업 모델은 앞서 말한 기업들과는 사업의 결이 다른 경우가 많기 때문에 투자의 대상이 되려면 기업들에게 많은 변화가 있어야 할 거야. 그 과도기적 과정에서 예술 콘텐츠와 인테리어 소품을 결합해서 나오는 제품들이 많아지는 것이고, 엘디프도 바로 그런 과정을 겪고 있는 거겠지.
역설적으로, 그래서 예술 스타트업이 투자 받았다 하면 그 금액이 얼마든 그 회사는 정말 대단한 일을 해낸 거라고 봐야 돼! 또한 그렇기 때문에 엘디프도 융투에 대해 유보적으로 보게 되는 거야. 기왕 투자를 받을 것이라면 분절된 시장의 촘촘한 타겟을 대상으로 하는 지금이 아닌, 광범위한 대중을 상대로 큰 사업을 일으켜야 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받고 싶은 마음인 것이지.
가방은 에르메스, 아이돌은 에스엠, 그림은 에르디프.
개인 취향을 기반한 소비 행태로 인해 예술 시장은 정의가 어렵다는 점 + 다품종 소량생산의 소매업의 성격을 띠는 것 + 예술이 사치재라는 점. 이 세 가지를 적고 나니 (첫 번째 조건을 제외하고 생각했을 때) 결국 브랜드 가치가 예술 기업의 가치가 될 것이고, 결론적으로 예술 기업은 명품 브랜드와 같은 전략을 취해야 하는 것인가? 라는 또 다른 고민이 시작되네. 현재까지는 그랬던 것 같아. 비싸면 비쌀 수록 더 높은 비딩값으로 낙찰이 되고, 유명하면 유명할 수록 콜렉터들이 오픈런까지 하면서 작품을 소장하니까. 우리들의 큰 형님 서울옥션이 하는 것처럼 말야.
그런데 또 한 편으로는 문화 소양이 축적됨에 따라 더 일상적으로 예술을 접할 수 있는 저변이 마련되었고, 그래서 예술 스타트업들은 합리적 가격이면서도 예술 콘텐츠가 접목되어서 더 소장가치 있는 일반 소비재에 집중하는 것 같아. 엘디프도 그러고 있고. 소수만 향유하는 폐쇄적 시장에 대한 반항심이 있어서일까? 아니면 돈이 없어서 명품 브랜드를 만들기가 어려워서일까? 나는 시각 예술 상품도 문화예술 분야의 한 섹터로서 엔터테인먼트 사업처럼 대중을 매료시키는 대표 상품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환청을 가끔 들어 ㅎㅎㅎㅎ 누구나 쉽게 보고 들을 수 있는 아이돌을 기획해 내는 수만이 오빠네 회사처럼 말야. 시간이 지나봐야 무엇이 맞았는지를 알 수 있게 될테니 더 고민하기 보다는 여기서 글을 맺어볼게.
원래 우리 엘디프 내부의 건방진 캐치프레이즈는, "가방은 에르메스, 가전은 엘지, 그림은 엘디프"
오늘만큼은 스엠이 우리나라 문화예술계에 가져온 위대한 업적을 칭송하는 동시에 예술 기업은 명품 브랜드가 되어야하는가를 고민했던 하루로 기록하기 위해 약간 바꿔서 외쳐볼게.
가방은 에르메스, 아이돌은 에스엠, 그림은 에르디프!
차한별 - Across this divide
덕업일치 Issue No.4의 커버로 선보인 작품은 엘디프 아트레이블L 소속 차한별 작가의 <Across this divide>이다. 차 작가와의 인연은 서울일러스트레이션페어에서 시작된 것 같다. 정중하면서도 똑 부러지는 꼼꼼한 이메일, 좋은 인연이 될 것 같다는 마음이 들었다. 디지털 드로잉으로 원라인 드로잉을 선보이다가 현재는 린넨 천 위에 자수를 두는 형태로 원라인 드로잉의 원화 작업을 많이 하는 작가는 하나의 선이 만들어내는, 때로는 극단적으로 단순하다가도 가끔 극도로 복잡한 세계를 보여주는 넓은 스펙트럼으로 늘 놀라움을 준다. 차 작가가 엘디프와 계약한 작품 중 나 개인적으로는 가장 시선을 오래 두었던 이 작품 <Across this divide>은 바로 그 '복잡함'을 보여주는 작품 중 하나이다. 이번 덕업일치를 적어내려가면서 이 작품이 다양한 취향을 가진 소비자들이 만들어내는 예술 시장의 다이나믹함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고, 우후죽순 생겨나는 예술 스타트업들의 실루엣이 절묘하게 겹쳐져 하나의 새로운 아름다운 생태계를 만들어내는 것 같다는, 이 시장은 단순한 경쟁시장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지나친 낙관주의자로서의 마음으로 선정해보았다.
작가 노트 - Across this divide, 180x160cm, 2019
One-line drawing 으로 그린 ‘Across this divide’시리즈 중 한 점입니다. ‘Non-existent’의 하위 시리즈라고도 볼 수 있는 시리즈로 ‘Non-existent’와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인물의 모호한 표정과 몸짓, 알 수 없게 이어지는 선들, 최대한 배제된 감정의 표현은 보는 이에게 자유로운 해석의 여지를 줍니다. ‘Non-existent’시리즈와 가장 차별화되는 점이자 ‘Across this divide’시리즈의 가장 큰 특징은 많은 인물 모습의 등장입니다. 굉장히 많은 얼굴과 많은 몸이 한 선으로 뒤엉켜 있는 모습은 기묘한 느낌을 자아내기도 합니다. 한 인물의 여러 자아로 볼 수도 있으며, 여러 인물의 관계를 표현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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