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나 양벼락이야.
바쁜 일정들을 몰아치던 7월, 8월이었어. 7월은 엘디프의 원화 브랜드, 엘디프 오리지널의 신작 대방출 시즌이었고 8월 초는 국립중앙과학관의 <냥냥이 학술대회 with 댕댕>의 후원사로 참여하면서 서울-대전 운전을 하느라 진이 다 빠졌지. 드디어 일정 없는 토요일이 왔고, 다시 덕업일치를 켜본다. 거의 한 달 만이네 :)
지난 번 이야기는 2023년에 시작된 우하향 곡선의 서막을 알리며 끝났지. 우하향 곡선을 맞닥뜨렸지만 예비비가 있었기 때문에 "나아질거야, 나아지게 하자"라는 마음으로 조금은 버틸 수 있었어. 그렇지만 예비비가 점점 바닥나면서 나의 고질병, '자책'이 시작되기 시작했어. 2024년 상반기는 경험해보지 못한 '풍파'라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어. 추락하는 듯한 느낌에 나 스스로를 책망하기 바빠서 더 힘들었던 것 같아. 세상도 만만치 않은데, 내 편이 되어줘야 할 내가 나를 괴롭혔으니 말야. 근데 다행인 건, 내 주변 사람들은 늘 내 편이 되어주더라.
사적인 듯 예술적인, 덕업일치 - Issue No.21
지우고 싶은 2024년 상반기
고통을 받아들이는 4단계
사람들이 흔히 말하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밀어 닥쳤을 때 사람들은 여러 단계를 통해 그 고통을 받아들인다고. 내가 기억하기로는 부정 > 분노 > 체념 > 수용의 단계를 거친다고 한 것 같아. 2024년은 부정 > 분노 > 체념 > 수용을 분기별로 겪었다고 봐야겠다.
2024년 1분기에는 이런 상황이었어. 아냐, 내가 더 잘하면 돼. 그동안 육아하느라 회사에 너무 소홀해서 빵꾸가 난게 분명해. 내가 뭘 놓쳤지? 어디를 더 보강해야하지?
매출 추이를 그래프로 만들고, 그 그래프가 출렁일 때 어떤 이슈가 있었는지 분석하고, 온라인 광고는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분석하고, 매주 엘디프 전 멤버들이 모여서 각자의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공유하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어.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 Bond 라는 작가명으로 고양이 그림을 그리고 있던 나현수 공동대표를 설득해서 이걸 캐릭터로 발전시켜야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기도 했지. (판교 현대백화점인지 어딘지에 입점 돼 있는 오모테산도? 라는 곳에서 돈까스를 먹으면서 열을 내며 말했던 기억이 난다.)
받아들일 수 없었어. 왜 이렇게 된거지? 라는 의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두더지처럼 온 땅을 다 헤집고 다녔던 것 같아.
자책으로 인한 그라데이션 분노
최대한 일에 집중하면서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어. 왜냐하면 내가 특별히 잘 하는 분야라고 여겼던 '지원사업' 분야에서도 실패가 계속 됐기 때문이지. 서류는 기본으로 붙고 가는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떤 사업에 지원을 해도 서류에서 광탈되었기 때문이지. 이제는 나 자신한테 화살이 돌아가기 시작했어.
내가 그동안 너무 나태하게 일한 게 분명하다, 육아와 일을 병행한답시고 내 책임을 다 하지 않았으니 이런 일이 생기지, 지원사업 쓸 때도 대충대충 되겠지 하면서 써서 떨어진 게 분명하다, 내가 회사에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고 짐이 되다니, 나는 평생을 이렇게 어영부영 살다가 결국 성공 못하게 될 거다, 이렇게 어려울 때도 잘 하는 기업들이 분명히 있는데 내 능력이 턱없이 부족해서 극복을 못하다니 정말 분하다.
밑도 끝도 없는 자기 책망. 사실 그마저도 오만이었을지 몰라. 늘 나는 할 수 있고, 하면 되던 사람이라고 정의해왔지만 경기가 어려워지니까 사실 나는 그냥 보통 사람, 아니 그보다도 더 못한 정도의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걸 그때서야 생각하게 된거지.
그렇지만 늘 이렇게 자책하고 있을 때마다 동료들이 나를 도닥여줬어. '너는 충분히 잘 해왔고, 이 상황은 전국 아니 전세계가 겪고 있는 피할 수 없는 파도다. 파도에 맞서지 말고 파도를 타면 된다. 이 상황은 지나간다...' 나는 힘이 들 때마다 나대표에게 '나 정신교육 시켜달라!'고 당당히 요청했고 나대표는 이전에 했던 말을 여러 번 반복하면서도 짜증 한 번 안 내면서 우리는 할 수 있다는 것을 주지시켜 주었어. 그렇게 나의 2024년 상반기가 끝나가고 있었어.
거대한 바다의 작은 새우임을 받아들이다.
파도에 맞서지 않기로 체념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는 위기가 오면 잘 이겨나갈 수 있겠지~ 어떻게든 살아남는다! 난 할 수 있어! 라고 큰 고민 없이 사업을 시작한 것 같아. 그런데 뭘 해도 안되는 때를 겪고 나니, 내가 이길 수 없는 큰 파도라는 게 무엇인지 알겠더라고. 남들이 그 파도를 이기는지 마는지는 나랑 상관이 크게 없더라. 나는 그냥 나의 힘과 나의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내 판단에 내가 넘기지 못할 파도라면 과감하게 파도 밑으로 들어가는 것이 맞는 거더라고.
나의 2024년 3분기는 그런 해였어. 부정과 분노의 2024년 상반기를 거친 후로, 내가 그리 대단한 사람도 아니라는 것을 체념하듯이 받아들였어. '내가 꿈꾸는 미래는 안 올 수도 있다. 나의 여정은 그냥 여기까지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뭐 어쩌겠어, 이미 망쳐버린걸...' 이런 마음이 컸어.
그렇지만 나에게는 작은 희망의 증거가 하나 남아있었어. 그건 2분기 때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모집했던 <오픈이노베이션 사업>에 냈던 기획안 하나야. 그때는 지원사업을 넣었다 하면 죄다 서류에서 광탈되던 때라 이것도 떨어지겠지 뭐. 하는 마음으로 썼어. 엘지유플러스의 '무너' 캐릭터를 활용해서 어떤 사업을 할지 기획안을 내는 거였어.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안 될 거니까 그냥 나 하고 싶은거 다 적어보쟈! 라는 마음으로 엄청 낄낄낄 키키키키키 거리면서 사업을 구상했어. 초장 무너, 간장 무너 등등 무너들에게 페르소나를 부여하면서 이야~ 이거 이렇게 만들면 너무 재밌겠다!! 하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친 기획안이 하나 있거든. 그게 서류는 통과하더라? 대면발표에서 내가 너무 긴장해서 벌벌 떨긴 했지만 그래도 최종 결과를 보니 합격은 아니지만 '후순위'로 합격을 시켜주더라고.
재밌게 했으니 이 정도라도 감사하다고 생각했어. 그러면서 스스로 깨닫게 되었지. 심각하게 생각 안하고 재미있게 했더니 좀 좋게 봐주시는구나. 앞으로도 재밌는 거 많이 해야지!
오늘만 사는 새우가 되겠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엄청 잘난 건 아니어도, 또 그렇게 못난 존재도 아니라는 걸 받아들였어. 이 정도가 내 역량에 딱 맞는 수준이다. 회사가 아예 사라지지는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라는 정도의 작고 하찮지만, 타지 않고 살아남은 심지가 있었지.
비로소 이런 결론에 이르렀어. 나는 오늘의 할 일에만 집중한다. 내일도, 다음주도, 내년도, 10년 뒤도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 할 일이 있다면, 미루지도 당기지도 말고 그냥 오늘 한다. 그냥 한다. 그러다보면 나에게도 운이라는 게 오겠지? 근데 그 운이 오지 않더라도 나는 그냥 오늘의 나를 살아내겠다. 아프면 아픈 대로, 망하면 망하는 대로, 잘되면 잘 되는 대로.
그리고 새로운 다짐을 하게 되었어. 나중에 정말 잘 되는 순간이 오더라도 절대, 결코, 네버, "내가 잘 해서 잘 된거다."라고 말하지 않겠다. 나는 그냥 작은 새우일 뿐이다. 이 바다가 갑자기 나보고 고래 등을 터뜨릴 수 있는 기회를 주면 고래 등을 터뜨려보려고 노력은 하겠지, 소 뒷걸음질 치듯이 어찌저찌 하여 고래 등이 터질 수도 있겠지, 설령 그렇다 해도 "와씨 나 진짜 미친 새우야 난 너무 멋져!!! 이건 다 내가 잘해서 그런거야!!!"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 즉시 나락에 떨어져도 아무 변명도 하지 않겠다.
사업을 성공시켜서 으시대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어. 지금도 불쑥불쑥 진짜 성공해서 떵떵거리고 싶다! 라는 마음이 스믈스믈 올라오곤 해. 그렇지만 그 때마다 나를 다스려. 그런 건 올 수도 있지만, 안 올 가능성이 더 높다. 그리고 바늘 구멍을 뚫고 그것이 내게 온다 해도 나 자신이 잘해서라고 생각하지 않겠다.
이렇게 고통을 수용하는 단계까지 오니까 매출이 바닥을 뚫을 기세로 빌빌 기더라고 푸하하하하하하하하~~ 대출이랑 투자받은 게 없어서 땅까지 파고 들어가진 않았으니 그걸 다행이라고 여겨야할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소담 - 개벽
덕업일치 Issue No.21의 커버로 선보인 작품은 소담 작가의 <개벽>이다. 소담 작가와는 개인적인 인연이 없다. 서울일러스트레이션페어에서 멋진 작품을 걸고 있는 소담 작가의 부스를 만나, 수줍지만 공손하게 엘디프에 대한 소개를 메일로 보내드려도 괜찮겠냐고 여쭤보았고 그를 계기로 계약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 전부이다. 소담 작가의 많은 작품들이 바다를 소재로 하고 있는데, 끝을 알 수 없는 바닥을 품은 무시무시한 푸른색부터 백사장이 깔린 외딴 섬에 드론을 띄워 보는 듯한 청량한 바다도 있다. 작가와 엘디프가 계약한 작품들은 공통적으로 파도를 담고 있다. 파도는 집어삼킬 듯한 모습을 하고 있기도 하고, 한바탕 휘몰아친 후 소강 상태에 머무른 듯한 모습이기도 하고, 서핑을 할 수 있으려나? 싶은 정도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 작품보다 더 거칠고 강한 파도를 표지로 삼을까 싶었지만, 지나보니 그 정도로 무섭고 괴로운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어 약간의 에메랄드 빛이 섞인 <개벽>이라는 작품을 선정하였다. 이루 말 할 수 없이 어렵고 뭘 해도 안되던 시기였지만, 내 주변의 그 누구도 나를 탓하지 않음은 물론이고 오히려 스스로에게 화살을 돌리는 나에게 아낌없는 지지와 응원을 충전해주었기 때문이리라. 2024년의 파도는 쪼렙의 나를 무너뜨리기에 충분한 파워를 가졌던 것은 분명하지만(그리고 만약 나 혼자서 이 모든 것들을 해결해야 했다면 나는 진작에 포기했을 것 같지만) 내 가족, 내 동료들, 그리고 나를 만나면서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반응해주었던 모든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이 터질뻔한 내 등을 구원해주었다.
서핑을 할 때 파도가 너무 높으면 오히려 물 속으로 들어가서 파도를 넘긴다고들 한다. 2024년 상반기에는 파도를 타겠다고 난리를 부렸지만, 하반기에는 그냥 물 속에서 숨을 최대한 참고 파도가 지나가길 기다렸다. 2025년이 되었다고 그 파도가 다 지나가거나, 내가 파도를 엄청 잘 타는 인간이 되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내가 새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내가 고래이길 바랐지만 말이다. 그래도 새우임을 받아들이니 바다에서 살기가 조금은 수월해진 것 같다.
작품 정보 - 개벽, 14.8ⅹ21cm, Oil pastel on paper,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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