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나 양벼락이야.
피부과 가는 날이 또 돌아왔어. 얼굴 한 번 싹 매만져주고 스벅에서 줌미팅 하고 나니 뭔가 내가 잘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 게다가 오늘 덕업일치를 3주만에 또 열었잖아? 미루기 대장, 벼락치기 대장 양벼락에게 이것은 정말 기적과도 같은 일이지 ㅋㅋ
지난 편에서는 창업 초기 당시 '같이 일할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나의 게으름을 이겨낼 부지런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사람이 디자이너였으면 좋겠다!'하는 요행수 가득한 나의 마음을 가감없이 드러냈지. 그러던 중에 고등학교 연극반 선배님이, 아니 무려 디.자.이.너. 선.배.님.이 때마침 회사를 그만두셨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것까지 적으면서 14편을 마무리했지. 선배님이 본인도 퇴사했다며, 디자인스튜디오 창업했다고 하시며, 근황을 나누는데 말씀을 나누다보니 선배님 집이랑 엘디프 사무실이 지근거리에 있지 뭐야??? 오 이참에 양벼락이가 요즘 어쩌구 지내나 시찰(?)하러 오신다지 뭐야??? 어디 그뿐일까, 고등학교 동아리 모임 이후로 약 5~6년 만에 다시 뵙는 선배님이 사무실 한 번 스윽 둘러보시더니 취미 삼아서 '엘디프 홈페이지 디자인 개선'을 해주고 가셨지 뭐야??????
사적인 듯 예술적인, 덕업일치 - Issue No.15
나타났다, 디자이너!
초고스펙 선배님의 디자인 훈수
이 선배님이 홈페이지를 스윽 훑어보면서 이것은 이렇게, 저것은 저렇게 바꾸라고 하는 말을 열심히 받아적으면서 이게 웬 떡이냐 싶었어. 선배님은 내가 만든 꼬질꼬질 너덜너덜한 상세페이지를 보면서 "야 ㅋㅋㅋㅋㅋㅋㅋㅋ 애썼다 ㅋㅋㅋㅋㅋㅋㅋ"하며 나를 측은히 여기셨지 ㅋㅋ
그러고선 무슨 일이 있었냐고? 아니. 아무 일도 없었어. 그 선배님은 본인만의 사업을 이미 시작하셨거든. 그런데 아직 사업 초기라 시간이 남으니 엘디프 홈페이지 디자인도 좀 봐주면서 본인 레퍼런스로 사용하시겠다고 하셨지. 나야 뭐 땡큐지?
그런데 내가 하는 사업을 좀 둘러보시더니 "양벼락이 재밌는 거 하네? 나도 은퇴하면 포스터샵 같은 거 하고 싶은데" 하시더라구. 나는 내심 '이대로 계속 오셔서 디자인 훈수 자원봉사 해주시면 좋겠다...' 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쳤지만, 나는 그를 채용하기에는 내 월급도 못 가져가는 가난뱅이었기 때문에 그냥 상상만 하고 말았지.
약은 약사에게, 디자인은 디자이너에게!
그렇게 간간히 도와주러 오시던 선배님이 어느 날은 리플렛 디자인도 해주시고, 액자 포장 디자인도 훈수 둬주시고 하다 보니 언감생심이라고, 아 진짜 이 선배님이 일을 같이 해주면 좋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러다가 어떤 지원사업에 선정되게 되면서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많은 돈을 지원 받을 수 있게 된 거야. 이 정도면 선배님하고 한 번 굴려볼 만한 돈 아닌가? 싶었지. 그래서 선배님한테 내가 돈을 이만큼 지원 받게 됐는데 이 지원사업 같이 운영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더니 선배님이 흔쾌히 허락하셨지. 그 이후로 지원 받은 돈을 어떻게 쓰자, 무슨 행사를 열자 등등 기획을 함께 하게 되었어. 자연스럽게 나는 저작권 계약, 회계, 인스타그램 같은 업무를 자연스럽게 맡게 됐고 선배님은 엘디프 홈페이지, 상세페이지 디자인은 물론이고 엘디프라는 회사의 브랜딩을 맡게 된 거야. 옆에서 포토샵 단축키 누르면서 파바바바박 상세페이지 만들어내시는 선배님을 보면서 나는 이 말을 입에 달고 살게 되었어.
"약은 약사에게, 디자인은 디자이너에게!"
불(나)과 물(선배님)이 만나 금(엘디프)를 단련하다.
고등학생 때부터 알던 사이라서 친구처럼 재밌게 일 했을 거 같지? 사실은...... 언성 높여 싸우는 소리가 옆 사무실까지 가감 없이 들릴 정도로 심하게 싸워서 옆 사무실에 미안해야 할 정도였어. 일 하면서 대화 방식도 다르고, 일하는 스타일도 달라서 서로 오해가 많이 쌓였는데 둘 다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 크게 부딪히곤 했지. 극T와 극F의 첨예한 전쟁이었달까? 접점을 찾을 수 없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는 느낌이 강해서 매일 사무실 가는 길에 '오늘은 뭐 때문에 싸우게 되려나...' 생각하며 출근하던 날이 많았어. 그렇지만 아주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다 보니까 '이 사람이 나쁜 의도로 그랬을 리가 없다'라는 믿음이 무의식에 깔려 있긴 했어. 다행히 상대방도 나에 대해 비슷한 믿음을 가져주었고.
엄청난 마찰음을 내면서 부딪히던 와중에도 믿음이 있을 수 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었어. 서로 잘 하는 게 확실했고, 잘하는 게 서로 달라서 시너지가 좋았다는 점이야. 그리고 둘 다 본인 분야의 일을 굉장히 프로페셔널하게 처리하는 스타일이었고, 둘 다 결정하면 빠르게 실행하는 편이었어. 그러니 결정하기 전까지는 싸웠지만, 결정하고 나서는 말 한 마디 안 하고 숨 한 번 안 쉬면서 일을 팍팍 쳐낼 수 있었던 거야. 특히, 나는 빠른 결정과 순간적인 추진력 부스트업을 잘 하는 사람인 반면에 선배님은 여유로운 자세를 유지하면서도 매우 규칙적이고 부지런하게 하루 일과를 살아내면서 일의 흐름이 끝까지 유지될 수 있게 하는 정반대의 성격이라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을 수 있었지. 불과 물이 만나서 단단한 금을 만드는 과정이었다고나 할까? ㅎㅎㅎ
꿈★은 이루어진다
2018년은 역대급 폭염이 왔던 해였지. 안 그래도 많던 싸움이 더 잦아져서 머릿속도 후덥지근 했어. 그래도 선배님과 나는 꾸준히 새로운 작가를 발굴하고, 작품 수를 늘려가면서 아주 조금씩 회사를 키워나가고 있었어. 그즈음, 나는 여러 계약들을 맺으면서 '개인사업자'로서는 확장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이제 슬슬 법인 설립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지. 동업계약서도 없이 그냥 좌충우돌 일해왔기 때문에 서류상으로는 그냥 1인 개인사업자였어.
나의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는 자기객관화가 잘 된다는 점이야. 나, 빠르게 프로토타입을 만드는 추진력은 있지만 어느 정도 일이 궤도에 오르면 흥미를 잃거나 게을러지는 치명적 단점이 있어. (정말 양벼락이라는 필명은 너무 적절해!) 그런데 사업은 시작을 만드는 것보다 지속하고 다듬어가가야 유지되는 거더라. 그래서 늘 '물처럼 끝까지 흐름을 가져가는 사람들'이 내 곁에 있어줘야 한다고 생각했어. 게다가 그 사람 중 하나는 직원인 게 아니라 나와 같은 위치에서 사업을 바라봐주는 '동료'여야 한다는 생각이 컸지.
내 장점이 자기 객관화랬잖아? 나의 단점도 자기 객관화야. 내가 잘못한 것들을 너무 잘 알다 보니까 사건의 원인을 나에게서 찾아내려고 하고, 내 장점은 뒷전으로 둘 때가 많았어. 계속 스스로를 탓하며 나 자신을 괴롭히는 성격인거지. 그런데 이 선배는 환경을 해석하는 능력이 아주 뛰어났고 마음에 여유가 있는 사람이었어. 그래서 내가 볼 땐 내가 능력이 부족해서 망친 것처럼 보이는데, 이 선배는 별 일 아니라는 듯이 '그냥 아다리가 안 맞은거여.' 하고 지나간 일을 쉽게 퉁 쳐버리더라고. 처음엔 그렇게 생각하는 게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일을 마무리 짓는 것 같아서 싫었는데, 내가 평정심을 잃을 때 옆에서 'So what?' 해주니까 결론적으로는 큰 도움이 되더라고. 싸우느라 힘들지만 일은 순항할 수 있었지.
그래서 하루는 맘 잡고 물었어. "선배는 엘디프야?" 대답은 너무 간단했어. "나? 어, 엘디프지?"
이 선배가 맘 바꾸기 전에 얼른 발목을 잡아버려야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길로 법인 사업자 낼 준비를 후다닥 마쳤어! (그러다 중간에 역대급 개판으로 싸워서 법인 등기 관련 서류를 법무사한테 우편으로 보내기 직전에 엘디프 그대로 빠그라져서 서류 다 찢겨 하수구 들어갈 뻔했음ㅋㅋㅋㅋㅋㅋㅋ) 우여곡절 끝에 엘디프는 모든 의사결정을 함께 논의해야하는 '공동대표'라는 형태를 채택했어. 엘디프에 그토록 바라고 바라던, 초고스펙의! 부지런한! 디.자.이.너.가 무려 공동대표로 함께 하게 된 거야!
Studio Rainmaker - 입춘대길
덕업일치 Issue No.15의 커버로 선보인 작품은 Studio Rainmaker 작가의 <입춘대길>이다. 지금은 단종된 작품이지만, 작가의 허락 없이 올릴 수 있는 이유는? 이 작품의 작가가 바로 공동대표 선배님이기 때문이다. 엘디프가 법인을 설립하기 전에 공동대표인 듯 아닌 듯 함께 일하기도 전, 본인 작품으로 에디션을 내도 괜찮냐며 만들어 출시한 작품이다. 당시에는 Studio Rainmaker 라는 가명(?)을 사용하여 출시하였다. 이름 자체가 입춘대길이고, 이 페어 작품으로 건양다경도 있다.
입춘대길 포스터가 있어서였을까? 사업 초기 잘 안 되던 시간에도, 어려운 구간을 지나고 있는 지금에도, 늘 마음 속에 "우린 무조건 잘 된다"라는 근거없는 믿음이 있었다. "도대체 언제 잘 되는거야???"라고 한탄하다가도 돌아보면 누구 하나 아프지 않고(라고 하기엔 내가 산후출혈로 정말 생사를 오갔지만) 돈이 없어서 너무 힘들지 않고(라고 하기엔 지금 유동성이 너무 어렵긴한데...ㅋㅋ) 무엇보다도 희망을 잃어 헤매지 않았던 것이 참 감사한 일이다. 조급증 말기 환자인 내가 눈 앞이 캄캄하고 원하던 성과가 없더라도 묵묵히 이 업을 유지할 수 있는 건 공동대표를 잘 만났기 때문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불과 물이 만나 상대방을 꺼뜨리거나 증발시키지 못했던 것도 '엘디프라는 공동 목표'가 있기 때문이었다. 불과 물의 중간에 껴서 달궈졌다 식혀졌다 모진 수모를 겪으며 단련된 엘디프가 이 봄에는 대길하여 번쩍번쩍 빛날 날이 오길 바란다.
작품 정보 - 입춘대길, Digital Graphic,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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